흥선 대원군은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권력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다양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흥선 대원군을 개혁을 통해 어떤 조선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논제: 흥선 대원군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지 자신의 의견을 써 보자.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바탕으로 할 것.)
개 요
서론: 19세기말 조선의 상황
본론: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
결론: 개혁 정책의 의미
19세기말 백성들의 원망은 폭발했다. 남쪽의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서 백성들이 봉기하여 관청을 공격했다. 백성들은 한양에 있는 임금과 조선의 조정에 맞서려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알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기를 원했다. 백성들이 개선해 주기는 원했던 문제는 세금 문제였다. 가장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삼정’이었다. 삼정은 전정, 군정, 환정의 세금 제도이다. 전정은 토지와 관련하여 내는 세금이고, 군정은 군대에 가는 대신 내는 세금이다. 환정은 먹을 것이 부족한 봄에 곡식이 떨어진 백성의 집에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기에 이자를 더해서 갚게 하는 것이다.
전정은 토지에 매기는 세금이니까 땅을 가진 사람 즉 지주가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지주들은 힘없는 소작농들에게 이 세금을 떠넘겼다. 소작농들은 땅을 빌리지 못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떠맡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소작료 내고, 세금까지 소작인이 내게 되면 먹을 양식이 없어 또 고리로 양식을 빌리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누구에게든 계획했던 세금 총액에 맞게 거둬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외면했다.
군정의 경우는 더 심했다. 관리 들이 군대에 갈 필요가 없거나, 갈 수 없는 사람까지 세금을 징수했다.. 심지어는 갓난아기나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했다. 세금을 내지 않고 도주하거나 하면 가까운 가족이니 이웃들에게까지 강제로 거둬들였다.
환정은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해주기 위해 시작한 구제책이다. 그러나 도리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환정은 곡식이 없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해서 갚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곡식을 빌려줄 때 모래를 섞은 곡식을 빌려주고 질 좋은 곡식으로 받아가면서도 법으로 정한 이자보다 높은 이자를 받아갔다.
'삼정’의 문란은 19세기 조선 백성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삼정'이 문란해진 원인은 세도정치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해 생산량이 늘어나고, 화폐 경제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늘어난 생산량이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세도 정치가들이 몽땅 빼앗아 갔다. 세도정치가 판을 치면서 나라 곳간은 비어 가고 세도가 가문의 창고엔 진귀한 물건들이 넘쳐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기한 백성들이 관청을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더 어렵게 한 것은 동아시아로 밀려드는 서구 세력의 압박이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1954년 일본도 미국의 위세에 눌려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러한 일로 조선인은 위기감이 극심해졌다. 흥선 대원군이 최고 권력자가 될 무렵 민심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린 흥선 대원군은 남의 집 음식을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며 궁도령이라 불렸다. 사람들은 그를 ‘파락호’라 부르기도 했다. 대원군 이하응은 부랑자처럼 행동하면서 남몰래 야심을 키웠다. 그리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며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흥선 대원군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삼정의 개혁이다. 전정은 전국적으로 실제 경작지를 조사하고, 장부에서 빠져 있는 양반들의 토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철저하게 거두었다. 또한, 토지가 많은 대지주 양반들이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사 모으는 것을 완전히 금지했다.
'군정'은 병역 의무를 진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했다. 일반 백성과 양반이 똑같이 내도록 하는 세금을 ‘호포’라고 한다. 신분에 상관없이‘한집당’ 내는 세금이라는 뜻이다.
‘환정’은 나라에서 직접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 주던 제도를 없애고, 대신 각 지방의 마을 단위로 ‘사창’이라는 기관을 새로 설치했다. 사창의 우두머리는 마을 주민이 직접 뽑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창에서는 가난한 마을인가 부유한 마을인가를 파악해서 그에 따라 곡식을 분배했다. ‘사창제’를 운영하면서 환정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관리들이 가로채던 이자 수입이 국고로 들어오게 되자,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되었다.
대원군이 꿈꾸는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대원군이 추진한 삼정 개혁의 기본 방향은 양반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세금을 내게 한 것이다. 경작지 조사에서 빠져 있던 양반 지구들의 토지에서 세금을 철저하게 거두고, 대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며 일반 농민이 소작농으로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양반들이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사 모으는 것을 아예 금지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서원을 철폐했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세력과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경복궁을 짓기도 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무리하게 경복궁을 짓는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물렸던 것은 백성들이 잘 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것 같기도 하다. 흥선 대원군이 적극적으로 통상외교 정책을 펼쳤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나 후대를 사는 나의 생각이고 당대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서양 세력에 두려움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한솔 플라톤 POWER CAMP.
'흥선 대원군은 어떤 조선을 꿈꾸었을까'
「흥선 대원군,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글 김덕련 외. 한솔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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