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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논술

정몽주, 고려와 운명을 같이하다

by 연채움 202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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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말은 대내외적으로 세력 변화가 심했다. 공민왕은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신진 사대부가 형성되었고, 정몽주는 고려 개혁을 주장한 신진 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를 포기하지 않으려다가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논제: 정몽주의 역성혁명 반대 선택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써 보자.

 

    개     요

서론: 고려말 대내외적인 고려 상황

본론: 정몽주의 개혁 방향

         정몽주의 선택

결론: 정몽주 선택에 대한 나의 생각

 

  고려말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351년을 전후해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원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368년 홍건적의 일부 무리를 이끌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새로 일어난 명나라는 중국 전부를 통일하였다.

고려 내부에서는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권문세족들은 양민의 땅을 빼앗고, 땅을 빼앗긴 양민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농사를 짓는 자 중에서 자기당을 가진 농민은 1002~3명에 불과했다. 거기에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들의 노략질은 고단한 백성들을 더욱 나락에 빠뜨렸다. 이때 10년 넘게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공민왕이 돌아왔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반원 정책을 폈다.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몽골식 변발과 몽골 옷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토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에 권문세족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공민왕을 살해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신진 사대부가 등장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가문의 배경 없이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신진 관료층이다. 주고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아보던 향리나 지방 중소 지주 집안 출신들이다.

신진 사대부들은 주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교적 왕도 정치와 농업 중심의 민본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정몽주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정몽주는 유교 경전 해설서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은 탄복시켰다.. 이색은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사소한 말로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는 정몽주라 평가하였다.

  정몽주는 명나라가 요동에 설치한 만주 통치기관인 정료위와 와 함께 군대를 양성해 원을 칠 것을 공표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언양으로 유배를 갔다. 우왕 3(1377)에 정몽주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이인임과 지윤의 추천에 의해 일본 사신으로 갔다. 목적은 일본 규수 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일본 해적을 금지할 것을 교섭하는 일이었다. 정몽주는 일본과의 외교에 성공하고, ‘봉사 시작이라는 일본 사신으로 갔을 때 지었다는 뜻의 일본 기행 시를 남겼다. 그리고 1380년 이성계를 따라 전라남도 운봉에 가서 왜구를 치고 돌아왔다.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이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은 가문의 배경 없이 능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관리가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진 사대부는 권문세족에 맞서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려면 신흥 무인 세력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정몽주의 주선으로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색 밑에서 공부한 절친한 동문이다. 정도전도 정몽주와 비슷한 시기에 원나라와의 친교를 반대하다 귀양을 갔었다.

1388년 최영은 우왕의 밀명으로 염흥방, 임견미 일당을 숙청하고 이인임을 유배 보냈다. 최영은 문하시중으로 사실상 실권을 쥐게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 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했다. 최영과 우왕은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오히려 고려 옛 땅을 찾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정몽주와 신진 사대부들은 명과의 전쟁보다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 정벌 불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다그쳤다. 이성계는 마지못해 출정했지만,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웠다. 이어 이성계는 정몽주, 이색, 정도전 조준 등 8명과 함께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을 추대했다.

정도전, 조준, 남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는 급진 개혁파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서두르지 않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오르고자 했다. 특히 정몽주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급진 개혁파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정몽주가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방문했을 때, 이방원의 시에 단심가로 화답하고 돌아가다 선죽교에서 56년 동안의 생을 마쳤다.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를  개혁하길 원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죽음을 맞이하고 조선은 건국되었다. 정몽주의 선택이 옳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결국, 조선 건국의 정당성에 있다. 정몽주의 명분은 성리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같은 이유로 급진 개혁파들은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민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고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불린다. 정몽주의 선택이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고려보다 더 나은 나라이어야 한다.

  경제의 기초가 되는 토지 제도를 비교해 보면 고려의 토기 제도는 전시과이다. 전시과는 관리에게 지급되는 것으로,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을 주는 것이다. 관료가 수조권을 행사하면 농민은 관료에게 조세를 납부해야 한다. 이는 농민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이어졌다. 조선은 과전법을 토대로 하였다. 과전법은 전시과와는 달리 수조권을 경기 지방의 토지에만 한정되었다. 비록 경기 지방의 토지만 과전으로 지급하였다 하더라도, 한정된 토지를 관리들에게 지급하고, 조세를 거두게 하는 것은 고려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고려가 귀족과 권문세족들을 위한 신분제 사회였다면, 조선은 양반 사대부들의 신분제 사회이다. 사대부들의 ‘민본을 주장하는 조선의 백성들 역시 신분제 사회의 고단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조선은 고려보다 자유가 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급진 개혁파의 역성혁명으로 인한 조선 건국을 찬성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셨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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