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는 박지원이 1780년 정조 4년에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 축하 사절단과 동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1권 「도강록」부터 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인 「피서록」까지 2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 「도강록」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이다.
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하루 종일 뿌리다 그치다 했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넜다. 30리를 더 가서 구련성 부근에서 짐을 풀고 한데서 잠을 잤다. 밤중에 큰비가 쏟아지더니 금방 그쳤다.
앞서 우리는 평안도 의주에서 열흘 동안 묵었다. 중국에 바칠 공물도 모두 도착했고, 여행 날짜도 매우 빠듯했지만, 장마가 져서 강물이 불어난 탓에 쉽사리 강을 건너지 못했다.
날씨가 맑게 갠 지도 나흘이나 지났지만, 강물의 기세는 험해서 나무와 돌들까지 둥둥 떠내려갔고, 흙탕물은 하늘과 맞닿을 듯했다. 그것으로 압록강의 발원이 얼마나 먼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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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아침에는 안개가 끼었으나, 나중에는 맑아졌다.
아침 일찍 떠났다. 도중에 되놈 대여섯 명을 만났는데, 모두 작은 당나귀를 타고 있었다.. 벙거지와 옷이 남루하며 얼굴들이 지친 듯 파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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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밖에서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가 밀집해 있는데, 대체로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아 있고, 지붕은 띠로 엮은 이엉으로 덮여 있었다. 등성마루가 높다랗고 출입문이 가지런하고 네거리가 쭉 뻗어서, 양쪽 가장자리는 마치 먹줄을 친 것 같았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양쪽 가는 사람 탄 수레와 화물을 실은 수레들로 북적거렸다. 어디로 보나 시골티라고는 전혀 없었다.
한낱 중국의 동쪽 변두리인 책문이 이렇듯 번화한데, 정작 도회지로 가면 얼마나 번화할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한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화끈해졌다.
‘이는 일종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래 욕심이 없고 성격이 조촐하여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아직 그 만 분의 일도 보지 못하고 벌써 이런 마음이 들다니, 어찌 된 까닭일까? 이는 아마도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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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서 내원, 정 진사와 함께 구경을 나섰다. 봉황산은 이곳에서 6,7리 밖에 안 된다고 했다. 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뾰족하니 기이하게 생겼다. 산속에는 옛 고구려 안시성의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틀린 말인 것 같았다. 삼면이 하나같이 깎아지른 듯하여 나는 새라도 오를 수 없을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좁은 곳에서 어떻게 많은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렀을까 싶다. 아마도 고구려 때의 작은 초소가 있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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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뚜껑 위엔 도르래를 만들어 양쪽으로 줄 두 가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줄 끝에 버들가지를 걸어서 둥근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바가지 같았다. 그러나 그 속이 깊어 한쪽이 위로 올라오면 다른 쪽이 내려가서, 종일 물을 길어도 사람의 힘이 허비되지 않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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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으나 뒤늦게 맑게 개었다.
아침 일찍 변 군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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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까지는 30리쯤 남았다. 옷이 푹 젖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염에도 이슬이 맺혀 마치 구슬처럼 보였다.
서쪽 하늘 귀퉁이로부터 짙은 안개가 트이며 한 조각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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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보통 집을 지을 때 수백 보의 터를 마련하여 길이와 넓이를 적당하게 한다. 그런 다음, 사면을 똑바로 다져 측량기로 땅의 높고 낮음을 잰다. 그러고 나서 나침반으로 방위를 잡고 대를 쌓아 올린다..
기초는 먼저 돌을 쌓고, 그 위에 한 층 아니면 두세 층의 벽돌, 그런 다음 다시 돌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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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집을 세우는 데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단지 높은 담을 쌓을 수 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집 안팎 할 것 없이 벽돌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저 드넓은 뜰에 눈 가는 곳마다 온통 다 벽돌로써,, 마치 바둑판을 그려 좋은 것처럼 보인다.
집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다. 기둥은 모두 벽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비바람을 만날 일이 없다. 불이 번질 염려도 없도, 도둑이 들 염려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쥐, 샤, 뱀, 고양이 같은 것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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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의 둘레는 3리에 불화하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모양이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모 반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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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맑게 개었다.
배로 삼가를 건넜다. 배가 마치 말구유 모양으로 생겼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이었다. 이상하게 상앗대(배를 물가에 댈 때 쓰는 긴 막대)도 없이 양쪽 강 언덕에 아귀진 나무를 세우고 튼튼한 밧줄을 건너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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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새벽에 큰 비가 내려 떠나지 못했다.
정 진사를 비롯해서 여럿이 노름판을 벌였다. 소일로 할 겸 술값을 마련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내가 솜씨가 허투루 다면서 노름판에 끼어 주지 않았다. (중략)
7월 9일
맑고 몹시 더운 날씨였다.
새벽 서늘할 때 먼저 길을 떠났다. 장대가와 삼도파를 지나 난니보라는 곳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요동 땅에 들어서면 마을이 끊이지 않고, 길의 넓이가 수백 보에 이르렀다. 길 양쪽에는 수양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집이 쭉 늘어선 곳의 마주 선 문과 문 사이에는 장마로 연못처럼 물이 괴어 있었는데, 그곳에 마을에서 기르는 거위와 오리가 잔뜩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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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서로 어깨를 비비면서 우리를 손가락질하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짜 중국 여자, 즉 한족은 처음 보았는데, 모두 발을 작게 만들기 위해 잔뜩 동여맨 채 아주 작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하지만 생김새는 만주 여자들보다 못한 것 같았다. 만주 여자 중에는 꽃 다운 얼굴에 자태가 아름다운 사람이 많았다.
만보교, 연대하, 산요포를 지나 십리하에서 묵었다, 이 날은 50리를 걸었다.
박지원은 벽돌로 집을 짓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벽돌로 집을 짓는 거세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실생활과 관련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7월 1일부터 5일까지 비가 와서 떠나지 못하고, 소소하게 보내는 일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재미가 있다. 7월 6일에야 비로소 맑게 개이고 물이 빠져 떠날 수 있었다.
역사 속 인물인 박지원을 만나고 있는 착각이 들만큼 섬세하게 기록을 하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1권 「도강록」 (주)한국헤밍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