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함양 박씨전」은 『연암집』 ‘연상각선본’에 실려있다. 「열녀 함양 박씨전」은 ‘재가한 이의 자손은 높은 벼슬에 등용하지 말라’는 국법이 벼슬하고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하고 있다. 또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 목 차 ―
1. 여성 재가 금지법
2. 「열녀 함양 박씨전」 내용
2-1 열녀를 강요하는 현실
2-2 과부와 두 아들
2-3 열녀 함양 과부 박 씨
3. 진정한 ‘열녀’란
1. 여성의 재가 금지법
고려 시대까지는 계급을 막론하고 과부의 재혼이 자유로웠다. 1477년 성종 8년 7월부터 '재가한 사족 부녀의 자손은 관리로서 등용하지 않는다'는 금고법을 입법 시행하였다. 이 법은 재가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형사처벌하는 직접적인 개가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시대를 내려오면서 양반 계급에서 재가하지 않는 행동이 확고한 법으로서, 또는 윤리로 지켜졌다. 법률상 재가의 자유가 선언된 것은 1894년 고종 31년 6월 28일 즉 갑오개혁에 의해서였다. 이 선언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윤리의식은 해방 후에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2. 「열녀 함양 박씨전」 내용
2-1 열녀를 강요하는 현실 비판
중국 제나라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열녀는 두 사내를 섬기지 않는다.”
〈시경〉이라는 책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온다. 옛날 우리나라의 법전에는 ‘재혼한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마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이 법은 온 백성이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벼슬을 하는 양반들이나 지켜야 아는 법이었다.
양반들이나 지켜야 했던 개가금지법은 몇백 년이 지난 박지원이 살았던 조선 후기에는 양반집이나 여염집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과부가 절개를 지키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절개를 지키는 것은, 풍속이 되어 버렸고, ‘열녀’라는 말은 ‘과부’라는 말고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재혼하지 않고 혼자 늙어 가는 것만으로는 절개를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과부들은 밝은 세상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저승길로 가려한다..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독약을 마시기도 하고 끈으로 목을 졸라매기도 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극락이라도 가는 것이라 여긴다. 절개를 지키려는 과부들의 마음이 열렬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과부의 개가 금지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자결을 선택하거나 강요당하고 있었던 현실을 지적하면서, 절개를 지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2 과부와 두 아들
과부의 두 아들이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제는 어떤 사람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래,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벼슬길을 막으려 하느냐?”
아들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선조 가운데 과부가 있었는데, 그 과부의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면 안 된다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습니다.”
(중략)
“바람은 소리만 나지 형태가 없다. 아무리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바람과 같은 소문만 믿고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한단 말이냐? 게다가 너희들도 과부의 자식이 아니더냐? 과부의 자식이 어떻게 과부를 탓할 수 있단 말이냐? 잠깐 기다려 보아라. 내 너희에게 보여 줄 게 있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엽전 한 닢을 모여 주었다. 어머니는 ‘이 엽전이 죽지 않게 만들어 준 부적’이라고 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십 년 동안 밤에 잘을 이루지 못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엽전을 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엽전을 열 겹으로 잘 싸서 간직하고 있는 까닭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요즘도 가끔 씩 이 동전을 보면서 그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단다.
그제야 두 아들은 어머니가 오랜 세월 얼마나 힘겹게 지냈는지 알아차렸다. 작가는 “이 어머니야말로 진짜 ‘열녀’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라고 했다.
2-3 열녀 함양 과부 박 씨
안의현 관아의 아전 박상효의 조카딸이 함양으로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되었다. 박씨 집안은 대대로 아전 노릇을 했는데 아비의 이름은 박상일이다. 박 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나이 열아홉 살에 함양에 사는 임술증에게 시집을 갔다. 박 씨가 시집가기 몇 달 전 어떤 사람이 박 씨의 할아비와 할머니를 찾아와 ‘임술증이 뼛속까지 병이 들어 살아날 길이 없으니 혼인을 물리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심부름꾼을 보내 알아보았다. ‘심부름꾼이 가서 보니까 술증은 폐병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해대고, 어찌나 야위었던지 마치 허깨비가 걸어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녀딸을 술증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박 씨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지난번에 바느질해 놓은 옷은 누구의 몸에 맞춘 것이고, 또 누구의 옷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처음 바느질해 놓은 옷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술증에게 시집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렇게 박 씨는 술증과 결혼을 하였다.
박 씨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나처럼 나이 어린 과부가 오래 산다면 두고두고 친척들에게 동정이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은 남편을 잃고도 오래 산다고 나를 나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빨리 이 몸이 없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남편이 죽은 뒤 장사를 지내고, 죽은 지 일 년이 되면 지내는 제사인 소상과 이 년이 되면 지내는 대상을 지내고, 남편이 죽은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따라 죽었다.
3 진정한 ‘열녀’란?
박지원은 일찍 과부가 된 여인이 ‘동전을 굴리면서’ 고독과 슬픔을 이겨내고,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여인과 함양의 박 씨를 대비해서 보여준다. 그 이유는 진정한 ‘열녀’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박지원은 ‘박 씨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행동을 완곡히 비판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퍼져있는 사회 풍조와 사회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사회 제도가 얼마나 여성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받게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열녀 함양 박씨전」 『박지원 단편』 한솔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