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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논술

무신 정권기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by 연채움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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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 정변이 일어나기 전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이 권력을 독차지하던 시대이다.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무신 정권기라는 격동기에는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도 끊이지 않았다. 농민과 천민의 사회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논제: 민중들의 의식 변화와 관련하여 무신 정권기가 고려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설명하는 글을 써 보자.

 

개요

처    음:  무신 정권기 이전의 고려 사회

가운데: 무신 정변의 원인

             민중들의 의식 변화

    끝   :  무신 정권기가 사회에 미친 영향

 

    고려 초기는 호족과 연합정권이었다. 그러나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한 고려는 점차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로의 체제를 이루어 갔다. 고려 전기는 귀족 사회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지방의 호족이 호족으로서의 독립적인 힘을 포기한 대가로 중앙관리로서 일정한 특권을 누렸다. 그래서 중앙관리들은 자신의 지위를 자손에까지 확대해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누렸다.

   12세기 이후 고려 사회는 점차 변하였다. 과거를 통해 진출한 관료들은 중앙의 중요 관직을 차지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일부 관리와 권세가들은 국가에서 전시과로 받은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고리대를 통해 일반 백성들의 땅을 빼앗기도 하였다. 그래서 권세가들에게 토지를 빼앗긴 백성들은 생계가 어려운 데다가 무거운 조세 부담까지 져야 했다.

   관료들 가운데 일부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경원 이 씨 일족은 왕실과 거듭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다. 이자겸은 딸들을 예종과 인종의 왕비로 두어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였다. 국왕의 자리를 넘볼 정도였다. 인종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왕실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묘청은 서경에서 개경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자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무신 정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였다. 고려 사회에서 무신은 법제적으로는 문신과 동등한 대우를 대우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신 중심의 고려 전기 사회에서 무신은 승진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고, 같은 등급의 문신에 비하여 천시되었다. 문신들은 정치와 경제의 권력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무신의 고유 영역인 군대를 지휘하는 병마권 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래서 고려 전기의 무신은 문신 정권을 지켜 주는 일개 호위병에 불과했다.

   무신이 차별받았던 이유는 문신에 비해 낮은 신분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중부는 평민 출신, 이의민은 천민 출신이었다. 문신과 무신들 사이의 갈등은 출신 신분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문신들의 무신 천대는 무신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정중부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 촛불로 수염을 그을리는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무신의 난은 조직이 주도하거나 어느 한 개인의 치밀한 사전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오랫동안 문신들에게 멸시당해 온 무신들의 불만이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무신의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신 정권 초기에는 무신 지배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 기관을 갖지 못하고, 무반의 합의 기관이 중방을 통해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정권 초기의 무인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 정중부로부터 경대승-이의민-최충헌으로 정권이 바뀐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권의 불안정한 상황을 마무리 지은 이는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권력을 잡자마자 과감한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민중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무신들의 집권은 농민, 천민에게 신분제에 대한 문제의식 갖게 하였다. 고려 사회는 귀족·중간층·양민·천민의 신분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신 정권기 신분제보다 실력이 우선하는 풍토가 만들어지면서 농민, 천민들은 신분제가 하늘의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게다가 천민출신 이의민이 무신 정권의 최고 집정자가 된 것은, 농민과 천민들은 크게 각성하게 하였다. 민중들의 의식 변화는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조위총의 난, 천민인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의 농민 봉기 등 민중 봉기가 계속되었다. 만적은 국가에서 경계년(무신 정변)이래로 천한 무리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났으니,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는 고달프게 일하면서 채찍 아래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였다. 만적의 난은 11986인의 사노비들이 모의한 난이다. 만적의 난은 노비 순정의 고발로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사회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초에 걸쳐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과 천민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천민들은 이러한 봉기를 통해 군현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던 향, , 부곡이 없어지게 되었다. 몽고가 쳐들어 왔을 때 정부는 강화도 섬으로 천도하여 개경에서와 다름없는 호화생활을 하였다. 지배층의 사치생활을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국토 방어와는 상관없는, 빛나는 문화유산인,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등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민과 천민들은 몽고와의 항전 중심에서 싸워야 했다. 대 몽고 항쟁을 통해 민의 의식은 급속히 성장했다.

 

 

한솔 플라톤 POWER CAMP 역사과정

'무신 정권기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백유선 · 신부식 ·임태경 지음, 두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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