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교육 플라톤 JC 과정 세계사 수행평가, 수행과제의 조건에 맞는 기사문 형식을 골라 기사 작성해보자.
( 사건기사/기획기사)
제목 : 파리 시민들 바스티유 감옥 점령 하다
부제 : 우리에게 "빵을 달라"
1.전문
루이 16세의 군대가 베르사유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늘어난 시위대는 “빵을 달라!” 고 외치며 빵집과 제분소를 습격했다.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성난 파도처럼 몰려갔다. 수비대가 총을 쏘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 이제 바스티유 감옥은 시민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2. 기사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는 왕의 권리가 신에게 받은 것이라 사상과 카톨릭 중심의 사회였다. 교회가 공공시설 대부분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일상생활에까지 통제했다. 프랑스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었다. 1789년 기준으로 보면 12만여 명의 성직자가 제1신분, 28만여 명의 귀족이 제2신분, 그 밖의 1245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노동자, 부르주아와 평민들이 제3신분이다. 전 국토의 30%를 차지하는 제1신분과 제2시분은 세금을 면제받는 등 특권을 누렸지만 제3신분에 속하는 농민과 노동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지대 내고, 나라에 세금 내고, 또 교회에 십일조 등을 내고 나면 아무리 일을 해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상업 발달과 함께 세력을 키워가던 부르주아들도 낡은 체제의 문제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무렵부터 프랑스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몇 년간 흉년이 들어서 식량이 계속 부족했다. 그런데도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미국과 손을 잡고 영국에 대항하려 했지만, 전쟁에서 너무 많은 돈을 써서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게다가 1785년부터 한파가 몰아쳐 식량 위기가 더욱 심해졌다. 곡물 가격이 치솟아 노동자들은 생활비 중 80%를 빵값으로 써야 한다. 식량 외에 다른 것은 살 엄두를 낼 수 없다. 상공업도 위축되어 도시는 실업자들로 넘쳤다.
1787년 2월, 루이 16세가 명사회를 소집했다. 명사회는 귀족과 성직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왕의 자문 기관이다. 루이 16세가 명사회를 소집한 이유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명사회를 통해 나랏돈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프랑스 정부는 1788년 8월 네케르를 재무방관으로 임명하고 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이 모두 참여하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1789년 5월, 무려 175년 만에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삼부회가 열렸다. 여기에 성직자 대표 298명과 귀족 대표 270명, 평민대표 598명이 참가했다. 그런데 투표 방식을 놓고 서로 의견이 갈려 아무런 합의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평민대표들은 1789년 6월 13일 독자적으로 ‘국민 의회’를 결성했다.
루이 16세는 평민파 의원들이 사용하던 의사당을 폐쇄했다. 그러자 평민파 의원들은 실내테니스 코트에 모여 대책회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절대로 국민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는 서약 했다. 이것이 ‘테티스 코트 서약’이다.
이때 루이 16세의 군대가 베르사이유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7월 11일에는 국왕이 재무장관 네케르를 파면해 버렸다. 그리고 국왕의 군대가 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려고 파리로 진격 중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의 불안감은 분노로 변했다.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파리 시민들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시민들은 “빵을 달라!”고 외치며 빵집과 제분소를 습격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수탈해온 지주와 귀족의 저택도 습격했다. 왕의 군대가 몰려오자 시위대는 자신들에게도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시위 지도자 중 한 명인 키미유 데물랭이 나서서 바스티유 감옥으로 가자고 외쳤다. 바스티유 감옥은 국왕에게 반대한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곳으로, 낡은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성난 파도처럼 몰려갔다. 수비대가 총을 쏘았다. 그렇지만 더욱 분노한 시민들은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어이 감옥을 점령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완전히 시민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점령 사흘 만에 루이 16세는 파리로 잡혀 왔다. 시민들이 직접 뽑은 시장은 왕에게 파리시를 상징하는 열쇠와 삼색휘장을 건네주었다. 그 휘장에는 파리시를 상징하는 붉은색, 푸른색, 사이에 왕실을 상장하는 흰색이 들어가 있었다. 이 휘장은 오늘날 프랑스 국기의 모태가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를 습격할 때 르쿠로 부인이 앞장을 섰다. 1789년 10월에 시민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쳐들어갈 때도 수천 명의 파리 여성이 앞장섰다. 그런데 새로 제정된 헌법에는 여성의 참정권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에는 여성의 권리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 만든 나폴레옹 법전에서는 그나마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결국, 혁명에 앞장섰던 여성들에게 혁명의 열매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모든 영역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정치적인 면에서 ‘왕의 지배’를 ‘법의 지배’로 바꾸었다. 법치주의와 의회정치 삼권분립 등 오늘날의 정치적 전통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 재민 사상에 따라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영주만 토지를 소유하던 특권이 사라졌다. 그래서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아졌다. 그러자 농업에도 자본주의적인 방식이 도입되었다. 프랑스 곳곳에서는 공업지역이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통해 돈을 벌게 된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 주도층으로 자리를 굳혔다.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 계급이 임금을 매개로 계약하여 일하는 관계를 맺으며 공업 생산을 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신분제가 무너지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역사의 주인이 되었다. 또한,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을 국가가 제공하는 의식이 퍼지면서, 근대적 의무 교육 제도가 뿌리를 내렸다. 세계관도 크게 달라졌다. ‘자유, 평등, 우애(박애)를 바탕으로 한 계몽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이 자리 잡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신분과 종교, 인종 등의 차이를 넘어 자유로운 존재이고, 법적 권리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나갔다.
프랑스 혁명의 성과는 한마디로 ‘시민 사회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신분제가 유지되던 봉건 사회를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시민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인류 역사가 중세에서 새로운 시대인 근대로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글 박남일 한솔 교육 플라톤
JUMP CAMP 세계사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