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一家)’는 ‘한 집안, 한 가족’, '가족의 따뜻함' 지닌 단어이다. 그런데 제목 ‘일가’는 반어적으로 쓰였다. 표면적으로는 한 가족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일가’의 의미가 사라져 가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청소년인 ‘나’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보면서 일가친척의 의미가 사라져 가는 세태를 비판하는 단편 소설이자,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일가
‘그날은 봄 방학을 한 날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역순행적 구성 즉 입체적 구성으로 서술한다. 서술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이다.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다가, ‘일가’ 아저씨와 어른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있다.
‘나’는 기분이 특별한 날이었다. 미옥에게서 편지를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버지에게 내가 미옥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보라고 말했었다. ‘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를 받은 것이다.
편지를 부치기 위해 면 소재지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미옥이가 사는 동네 잎을 지날 때는 혹시 미옥이가 길목에 나와 있지는 않은지 마을 안 골목으로 들어가 괜히 맴을 돌기도 하면서 자전거 페달을 한없이 느리게 굴렸다. (생략)
미옥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자전거 페달을 한없이 느리게 굴리’는 행동으로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나’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느 순간 미옥이가 나타났지만 정작 미옥이는 딴 곳만 바라보고 있어 미옥이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하며’ 직접적으로 ‘나’의 속마음을 표현함으로써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미옥이를 보지 못해서 열이 오른 얼굴에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겨울바람을 맞으며 농로를 달렸다. 그런데 드디어 ‘그날’, ‘봄방학 하던 날’ 미옥이에게서 답장을 받은 것이다.
나는 편지를 뜯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설레는 기분을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밤에 조용히 이불속에서 뜯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나’는 설레이는 기분으로 언덕이 시작되는 과수원 초입에서부터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페달을 힘차게 굴렸다. (생략)
“아아, 그 궁뎅이두 차암.”
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과수원 한복판에서부터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생략)
‘나’는 처음 보는 남자는 과수원에서 소변을 보고 나오는 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종종 과수원 속에서 일을 해결한다. 그 일을 두고 엄마와 아버지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엄마는 그 일이 아주 신경질 나 죽겠다고 했고,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나’는 엄마처럼 무척 싫어한다. 그 일을 싫어한다. 이 태도는 과수원에서 나온 낯선 남자인 ‘일가’ 아저씨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나’는 ‘진짜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가려고 하는데 “야야, 너 어데로 갑네?”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아저씨’가 북한사람이라 생각하고 무서워져서 막 뛰었다.
‘아저씨’는 랴오닝성 다렌에서 오신 일가친척이라지만 처음 보는데도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이기까지’ 스스럼없이 행동하였다. ‘아저씨’의 말투나 외양 묘사를 통해 아저씨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야야, 내가 무섭네? 무서워할 것 없다. 나는 너의 일 가니까는.” (생략)
‘아저씨’가 ‘나’의 가족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이유는 그가 일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저씨를 ‘아버지’는 반가워하였다. ‘나’는 아저씨와의 상봉으로 인해 미옥이의 편지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식구들만 있을 때 쓰는 도리 밥상을 접고 교자상을 폈다. 그러면서 엄마의 얼굴에는 수심이 깔리고 있었다. 엄마가 도리 밥상을 접고 교자상을 펴는 것은 아저씨를 손님으로 대접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엄마의 얼굴에 수심이 깔렸다는 엄마는 아저씨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아저씨는 한국에 돈 벌러 온 조선족이었다. 아저씨는 연변 이야기, 랴오닝성 이야기, 큰할아버지 이야기 등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했다. 우사에 소밥을 줘야 해서 안절부절못하던 아버지는 ‘나’에게 소밥을 주고 오라고 하였다.
“하아, 그놈들, 궁뎅이도 차암.”
그것은 내가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하고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엉덩이 쪽으로 손이 갔다. (생략)
‘나’는 아저씨의 말이 ‘나’에게 한 말인 줄 알고 손이 엉덩이로 갔던 것이다. 아저씨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미옥이 편지를 읽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아저씨가 못마땅하다. 아저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나’의 일하러 온 사람처럼 소먹이를 주고, 바닥을 청소하고, 과수원 거름을 냈다. 또한 넉살스럽게 ‘마당에 들어서며 제수씨 밥 안 줍네까? 뱃가죽이 아주 등가죽에 붙었습네다.’ 하고 우렁우렁하게 소리친다. 그런 아저씨를 보며 ‘나’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엄마는 “원 아무리 일가래도 저건 몰상식이야.” 하고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네 책상 위에 있던 웬 여학생한테서 온 편지, 내가 압수했다.” 엄마가 미옥에게서 온 편지를 압수한 이유는 ‘자기한테 온 편지를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공부는 안 하고 여자애한테 신경 쓸까 봐 겁나서’라고 생각한다. 편지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아, 드디어 편지가 오긴 왔구나. 축하한다 야.”하고 엄마와는 달리 기뻐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나’의 편을 들어 편지를 돌려주라고 한다. 그런 아빠가 ‘나’는 좋았을 것이다.
“여보, 당신 이제 보니 참 야만이군 그래.. 아니, 어떻게 자식한테 온 편지를 갈취해?”
“가, 갈취? 당신 지금 나보고 갈취했다고 했어요?”
“그럼 그것이 갈취한 것이 아니고 뭐야?” (생략)
아버지와 엄마는 언성이 점점 높아지며 싸웠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무서워서 ‘그냥 도망치고만 싶었다.’ ‘나’는 엄마가 화를 내는 이유가 겉으로 보기에는 ‘갈취’라는 말 때문이지만, 실제로 근본적 원인은 아저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갈취’라는 말을 한 아버지가 싫다. ‘나’는 부모님들의 싸움으로 ‘자기 존재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성장소설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미안하지만 네가 저녁 준비를 해야겠다.”
“어디 가시게요?”
엄마는 말없이 집을 나갔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아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은 결코 쓸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의 그 ‘결코 쓸쓸하지도 않은’ 뒷모습이 왜 그리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생략)
엄마는 집을 나갔다. 아저씨는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책하였다. 아버지도 아저씨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못 한다.
엄마가 집을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 밤에는 하도 잠이 안 와서 어둠 속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데 눈물 한줄기가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략)
‘나’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엄마가 집을 나간 것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옥이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옥이 편지를 너무 늦게 읽는 바람에 미옥이가 나오라는 장소에 가지 못해 관계가 끝나 버린 것이다.
휴우, 한숨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내 한 순 소리가 끝났는데도 어디선가 또 하나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오는 것이었다. (생략)
‘나’는 미옥이 때문에 한숨짓고, ‘또 하나 한숨 소리’는 아저씨이다. 아저씨는 현재 상황이 답답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나오는 한숨 소리일 것이다. 아저씨로 인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이다.
아저씨는 가족들이 과거에 고생스럽게 살았던 상황을 들려주었다. 나는 아저씨의 가난했던 처지를 이해하고 ‘거, 아저씨도 차암.’하고 아저씨의 말을 따라 한다. 아저씨와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아저씨는 떠나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아저씨 말투인 ‘차암’이라는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적으로 아저씨에게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재 ‘나’는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된다. ‘나’는 아저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글쎄다. 워낙에 형님들이 많아서 말이지.”하고 아저씨에 대해 무심하다.
“내가 내 외로움 때문에 울 때에는 아직 그가 덜 컸다는 증거고 나와 상관없는 남의 외로움 때문에 울 수 있다면 이미 그가 다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생략)
아저씨가 떠난 날 엄마가 돌아왔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된 ‘나’는 아저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미옥이로 인한, ‘나’의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외로움을 공감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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