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은 혼란한 삼국 시대 말기에 장군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의 사학자 신채호와 고려 시대의 유학자 김부식은 김유신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다. 김유신에 대한 평가가 분명하게 나뉘는 것은 김유신이 다양한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김유신을 어떤 사람일까요?
논제: 김유신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좋을지 자신의 의견을 써보자
개 요
서론: 인물에 재평가
본론: 김유신의 삶
결론: 권력의 야심가인가? 민족 통일일의 영웅인가?
역사적 인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평가가 이루어지곤 한다. 그 이유는 영웅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경우에도, 한 여자만을 사랑한 순정파, 전쟁 중에도 말 위에서 책을 읽었다고 하는 독서광, 법전을 편찬하여 법 앞에 평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 가치관을 도입한 혁명가, 유럽을 전쟁에 빠뜨린 독재자 등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김유신은 우리 민족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 외세를 끌어들이고 사대한 우리 민족의 반역자 등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럼 김유신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좋을까?
김유신은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 왕의 손자이다. 어머니 만명 부인은 신라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쪽으로는 가야 왕족의 후손이며, 어머니 쪽으로는 신라 왕족의 후손인 것이다. 김유신이 어머니 쪽으로 왕족이라고 할지라도 골품제도에 의한 김유신 한계는 분명히 보인다.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은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수련을 하였다. 장수로 성장한 김유신은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서 용맹함을 드러내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김유신이 화랑시절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전한다. 김유신이 천관녀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김유신은 틈만 나면 천관녀의 집을 찾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 만명 부인으로부터 꾸중을 듣게 되었다. 김유신은 뉘우치고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말을 타고 달리던 김유신은 천관녀의 집 앞에 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김유신은 칼로 말의 목을 베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일화는 소년 김유신을 복잡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천관녀와 헤어지기로 한 것은, 그렇다할지라고 말 못 하는 짐승을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김유신은 누이동생과 김춘추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다. 진지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그래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상태였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혼인을 했고, 김유신은 김춘추의 딸 지소와 혼인을 해 서로의 결속을 굳게 다졌다.
김유신은 백제에 첩자를 보내 백제를 혼란에 빠뜨린 후 멸망하게 하였다. 김유신의 5만 군사와 백제의 5천 군사가 황산벌에서 만났다. 김유신은 네 번에 걸쳐 백제군을 공격했지만 모두 지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백제의 5천은 결사대로, 정예군이다. 신라는 군사의 수는 많지만 보급을 담당한 비전투군인이 포함되어 있었을 테니까. 김유신은 김흠순의 아들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 관창을 백제군과 싸워 죽게 하였다. 이들은 화랑으로 어린 소년들이다. 백제의 장군 계백은 어린 관창을 차마 죽일 수 없어 두 번이나 돌려보냈다. 결국, 관창의 죽음으로 신라군은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까지 함락시켰다.
고구려의 원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삼국 통일 후 태대각간에 올랐다. 문무왕 12년 672년, 석문벌에서 당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던 신라군은 크게 지고 말았다. 이때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화랑으로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여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김유신은 전투에서 지고 도망쳐 온 아들이 부끄럽다며 원술을 죽여 달라고 하였다. 문무왕이 김유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김유신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원술을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 김유신은 선덕 여왕 때부터 문무왕 때까지 권력과 명예를 남김없이 누리고 7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전은 감추고 작은 승리를 과장한 기록이다. (……) 김유신은 지혜와 용기를 겸한 명장이 아니요, 음험하고 사납고 성급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큰 공이 전쟁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이다.”라고 평가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유신과 같은 이는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까지 잊지 않으니, 사대부가 알아야 할 것이며, 꼴 베는 아이와 소 먹이는 아이 또한 능히 아는 것이니, 그의 사람됨이 반드시 남보다 다른 점이 있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사람들은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만주가 우리 땅이 되어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때 만주를 호령하던 거란이나. 여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여진은 청나라를 세우고 대륙을 지배했지만, 여진의 후손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나라로 출발했다. 그렇게 700년 넘게 살아왔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은 통일한 후에 생겨나지 않았을까?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외세를 끌어들이고 당에 사대 외교를 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다. 대륙의 세력으로부터 방파제 역할을 충실히 하던 고구려가 멸망한 것에 대해 아쉬움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한 계기는 신라의 통일에서부터이다. 후에 발해가 건국되고 삼국으로 분열되는 등 혼란을 겪었지만, 고려의 통일 또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간혹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일 민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혈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분명히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같은 문화와 정치 체제를 공유한 상태로 ‘우리’를 형성했다. 이것은 때로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김유신이 정치적 야심과 협작, 비인간적 면모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삼국 통일로 인해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그의 공이 적다고 할 수 없다.
한솔 플라톤 POWER CAMP 역사과정 '김유신은 영웅일까'
「김유신 역사 법정에 서다」 이민아, 함규진 지음. 한솔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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