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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논술

관내정사 열하일기

by 연채움 202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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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정사는 산해관에서 연경까지에 이르는 기록이다. 이 부분에 백이·숙제 이야기와 박지원의 단편소설 호질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산해관에서 연경까지

   724

  날이 개었다.. 이 날은 처서다.

홍화포를 떠나 범가장까지 2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또 68리를 가서 유관에 도착하여 묵었다.

산해관 안의 경치는 밝고 아름다우며 굽이굽이 펼쳐있는 산과 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홍화포에서부터 돈대가 5리 또는 10리에 하나씩 있었다. 그 모양은 네모 반듯하며, 높이는 다섯 길이나 되었다. 돈대 위에는 세 칸의 집을 짓고, 그 곁에는 세 길 정도 되는 깃대를 세웠으며, 돈대 밑에 다시 다섯 칸의 집을 지었다.

집 앞에는 칼과 창 따위를 꽂아 놓았으며, 봉화 올리는 것과 망보는 것에 관한 여러 가지 조항이 벽 위에 죽 붙어 있었다.

 

  725

  맑게 갠 날씨였다.

  유관을 떠나 배음보까지 4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 날은 모두 89리를 지난 셈이다.

무령현을 지나니 산천이 더욱 밝은 기운을 띠었고, 성 안 거리에는 곳곳마다 패루 (거리에 있는 누각의 문)가 화려했다.

장복만 데리고 이 집 저 저 집을 둘러보았는데, 하나같이 주인이 없었다.

(생략)

  돌아오는 길에 조 주부를 만나 나란히 말을 타고 오면서 내게 말했다.

  “이 곳 무령 사람들의 인심이 좋지 못합니다.”

  조 주부도 내 말에 동감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령 사람들은 우리 조선 사람을 귀찮게 여긴답니다. 이 곳 무령 사람 중 서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래 손님이 오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 찾아오면 후하게 대접을 했답니다. 그 후 그 소문이 우리 나라에까지 퍼져 중국으로 볼일을 보러 가는 사람이라든지 사신들은 반드시 서 진사를 찾았답니다. 해마다 그렇게 접대하다 보니 그 일도 힘에 겨웠겠지만, 아무튼 서 진사의 집에서는 차츰 대접이 전만 못해졌습니다. 그러다 그가 죽은 뒤에는 그 아들이 조선 손님을 매우 귀찮게 여겨서 조선에서 사신이 올 무렵이 되면 좋은 그릇은 따로 숨겨 두고 너저분한 것들만 벌여 놓고 가까스로 인사치레를 할 뿐이었답니다. 오늘 그 옆집에서 피하고 숨은 것도 아마 서 진사네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726

  오후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몹시 불었으나, 곧 날이 개었다.

  아침 일찍 영평부를 떠날 때는 비바람이 선선했다. 성 밖 강변에 장이 섰는데, 온갖 물건이 다 모여 있고 수레와 말이 즐비했다. 능금 두 개를 사면서 보니, 내 옆에 대나무 상자를 멘 장사꾼이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다섯 개의 수정함이 있고, 그 합마다 뱀이 한 마리씩 들어 있었다.

(생략)

  장에는 또 다람쥐를 놀리는 ㅈ, 토끼를 놀리는 자, 곰을 놀리는 자들이 여러 가지고 재미있게 재주를 부리게 하였는데, 그들의 몰골은 모두 거지에 가까웠다.

곰은 크기가 개만 한데, 칼춤도 추고 장춤도 추며, 사람처럼 서서 다니기도 하고, 절도하고 꿇어앉기도 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는 등 사람이 시키는 대로 온갖 시늉을 다 했다. 그러나 그 꼴이 몹시 흉하고, 느려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생략)

  청룡하와 난하를 건넜다.

  야계타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날씨가 찌는 듯 업고 바람기라곤 한 점도 없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데, 갑자기 손등에 찬물이 떨어졌다.

(생략)

  얼마 후, 비바람이 좀 멈칫했다. 그러면서 밤과 같던 어둠도 약간씩 가시기 시작했다. 그제야 길 양쪽에 있는 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집을 두고도 비가 쏟아질 때에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했더라면 아마 숨이 막혀 죽었을 거야.”

  사람들이 떠들어 댔다.

  상점에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고 있자니, 하늘이 맑게 개고 바람과 햇볕이 산뜻해졌다.

우리는 술잔을 몇 순배 돌리고 나서 다시 출발하였다.

(생략)

 

  727

  아침에는 잠깐 선선했으나 낮이 되자 몹시 더웠다.

  어제 이제묘 안에서 점심을 먹을 때 고사리 넣은 닭찜이 나왔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생략)

  “제철도 아닌데, 어디서 그 고사리를 구했을까?”

가 물었더니, 옆 사람이 말했다.

  “해마다 우리 사신 일행은 이제묘에서 점심을 먹고, 또 언제든 고사리 요리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백이, 숙제가 주왕을 반대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살았기 때문에, 이제묘에서는 누구나 고사리 음식을 먹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 만드는 이는 우리나라를 떠날 때 마른 고사리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이제묘에 이르면 반드시 고사리 요리를 해 먹이게 되었답니다.(생략) ”

새벽에 떠나 도중에 상여를 만났다. 널 위에 흰 수탉을 놓았는데, 이는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라 했다. (생략)

 

  728

  아침에는 맑았다가 오후에는 바람과 천둥이 크게 일었다. 그러나 어저께 야계타에서보다는 훨씬 약했다.

새벽같이 풍윤성을 떠나 10리쯤 가니 고려보라는 곳이 나왔다.

  고려보의 집들은 모두 띠 이엉을 이어 몹시 초라해 보였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 수가 있었다. 경축년 (병자호란 다음 해)에 잡혀 온 우리 백성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관동 천여 리에 논이라곤 없었는데, 이곳만은 논에다 벼를 심고 엿이며 떡 같은 음식도 있어, 그들이 우리 풍속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신이 오면 하인들이 사 먹는 술과 음식값을 받지 않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인네들도 남자를 피하지 않고, 고국의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짓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인들은 이것을 기화로 술이나 음식을 마구 집어 먹고, 그것도 모자라 그릇이나 옷 같은 것을 요구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또 가게 주인은 같은 민족이라 믿고 심하게 지키지 않았는데, 우리 하인들은 그 틈을 타서 도둑직을 하기 일쑤였다.

  그 후로 고려보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꺼려 사신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게 되었으며, 가게를 지킬 때도 마치 도둑놈을 바라보둣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략)

  성 안에 들어가 한 상점을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지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정 진사와 함께 그 소리를 찾아 들어가니, 곁채 아랭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앉아서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생략)

 주인은 심유붕이라는 사람으로 나이는 마흔여섯 살이었는데,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품의 사내였다. 나는 곧 그와 하직하고 나오다가, 탁자 위에 놓은 구리를 녹여서 만든 사슴을 보았다.

(생략)

그리고 갱지에다 가늘게 쓴 글씨가 한 폭 걸려 있는데, 벽을 온통 다 차지하고 있었다. 글씨 역시 정교하고 아름답기에 무슨 내용인가 하고 읽어 나가다가, 그 글의 내용에 빠져 단순에 다 읽고 말았다. 그야말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었다.

(생략)

  나는 정 진사에게 부탁하여 중간에서 끝까지 베끼도록 하고,, 처음에서 중간까지는 내가 베꼈다.

우리가 그것을 다 베끼자, 심유붕이 물었다.

선생은 이걸 베껴서 뭘 하실 겁니까?”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읽혀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만들고 싶소. 아마 이 글을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아무리 튼튼한 갓끈을 매었다 해도 그것이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다 답하고 정 진사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불을 밝히고 다시 읽어 보니, 정 진사가 베낀 부분에는 틀린 글자가 수없이 많고 빠뜨린 글자와 글귀까지 있어 전혀 맥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내 생각대로 고칠 것은 고치고 보충할 것은 보충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호질이다.

 

  729

  날씨가 맑았다. 새벽에 옥전현을 떠나 20리를 가니 대고수점과 소고수점에 이르렀다.

산의 오목한 곳에 나무가 있는데, 몇백 년 동안 잎이 핀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나무는 가지자 줄기가 썩지 않아 사람들이 고수라 일컫고 고장의 이름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그곳에는 또 둘레가 2리나 되는 송가장이라는 성이 있는데, 송 씨들이 쌓은 것이라 한다.

송 씨가 이 지방의 큰 성바지여서 그 자손이 몇백 명이요, 모두 살림이 넉넉하여,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할 무렵, 자기들끼리 이 성을 쌓아 지켰다고 한다.

지금도 성 가운데에 높이가 여남은 길이나 되는 대가 셋이나 있고, 성문 위에는 다락을 세웠다. 또한 집 뒤에도 4층으로 된 높은 다락이 있고, 다락 꼭대기엔 금부처를 모셔 놓았다.

(생략)

 

  730

  맑은 날씨였다.

  계주는 옛날의 어양이다. 그 북쪽에 반산이 있는데, 위태로이 솟은 봉우리는 깎아 세운 듯하고, 그 봉우리마다 위가 퍼지고 아래가 가늘어 그 모양이 꼭 소반과 같으므로 반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전에 명나라의 유명한 문장가 원중랑이 쓴 반산기를 읽은 적이 있어 그 산에 기묘한 절 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회에 곡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함께 갈 사람이 없으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략)

 

  8월1일

  아침에는 맑고 찌는 듯이 덥다가 오후에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밤이 되자 우레와 함께 큰 비가 내렸다.

(생략)

  통주에서 연경까지 40리 사이는 돌을 깎아서 길에 깔았다. 쇠 수레바퀴가 돌에 닿는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정신이 없었다. 길 양편은 모두 무덤인데, 담을 가지런히 쌓고 나무가 울창하여 봉분은 보이지 않았다.

동악묘에 이르자, 사신들은 선양에 들어갈 때처럼 옷을 갈아입고 행렬을 정돈했다. 그때 통역관인 오림포, 서종현, 박보수 등도 청나라 관리들이 입는 예복으로 갈아입고 목에는 조주(청나라 때 5품 이상의 관리가 가슴에 달던 108개의 구슬)를 걸고 말에 올라 우리 사신 일행을 조양문으로 인도했다.

(생략)

 

  82

  맑게 개었다.

  어젯밤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일었는데, 그것이 아직 수리하지 않은 숙소의 창문으로 들어와 감기가 조금 들고 입맛을 잃었다.

 아침 일찍 예부, 호부의 책임자와 광록시(식량과 찬거리 등의 일을 맡은 관청)의 관원들이 관청에 모여들었다.

쌀과 팥이 대여섯 수레, 돼지, , , 거위, 채소 등이 바깥뜰에 그득했다. 각 부서의 책임자들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감히 떠드는 자가 없었다.

(생략)

 

  83

  맑게 갠 날씨였다.

  우리가 묵고 있는 서관의 문은 해가 뜬 뒤에 비로소 열었다.

  문이 열리자, 나는 시대와 장복을 데리고 첨운패루 밑까지 걸어가 태평차 하나를 세내었다. 태평차는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갔다. 주방에서 하루 동안 쓸 것을 주기에 시대를 시켜 돈으로 바꾸어 차에 실었다.

(생략)

  유리창에 들어가 보니, 첫 거리에 ‘오류거’라는 책방이 보였다. 지난해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책을 많이 샀다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그런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조선을 떠나올 때 소개받은 단원항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집은 찾기가 쉬웠다. 하지만 하인 셋이 문 앞에 나와서 말했다.

  “대감께서는 아침 일찍 관청에 나가셨습니다.”

(생략)

  밖으로 나오며 돌아보니, 그 늙은 마나님이 하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중문에 나와 있었다.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었으나 몸은 건강해 보였고, 그 나이에도 화장과 장신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생략)

 

  84

  맑게 개었다.

  어찌나 더위가 심한지 삼복이니 다름이 없었다.

  태평차를 몰아 유리창을 지나며 물었다.

  “이 창은 모두 몇 칸이나 됩니까?”

  “도두 해서 27만 칸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정양문에서 선무문에 이르기까지 가로 뻗은 다섯 개의 거리가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중국의 것은 물론 외국의 갖은 보화가 무진장으로 쌓여 있다고 했다.

 

  산해관에서 연경까지는 728일부터 84일까지 11일간의 여정이 나와 있다. 더위와 폭우 등 여름 날씨로 인한 어려움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무령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귀찮게 여긴다'는  장면에서 조선 사람들이 염치없게 행동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또한, 고려보 사람들이 조선 사신단 행렬을 꺼려하고 서로 원수 보듯 하게 되었다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웠다.  통주에서 연경까지 40리를 돌알 깎아서 도로에 돌을 깔았다거나 정양문에서 선무문에 이르는 27만 칸이 유리창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박지원을 상당히 놀라게 했을 듯하다.  이러한 부분은 이후 박지원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열하일기』 '관내정사'    작가 박지원   (주) 한국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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