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거는 삼국시대 신라의 화가로 삼국사기 열전에 나와 있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솔거는 그림 실력이 뛰어나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 그림이 너무 진짜 같아서 새들이 날아와 계속 부딪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떤 솔거의 죽음」은 이 솔거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창작된 소설이다.
1. 작가 조정래
1943년 8월 17일 전라남도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1970년 ‘누명’으로 등단하였다. 대표작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이 있으며, 『불놀이』 『마술의 손』 『상실의 풍경』 등 다수의 1970년대와 80년대 산업화의 뒷이야기와 사회 현상, 분단의 문제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소설 속에 담내고 있다.
2. 「어떤 솔거의 죽음」 줄거리
어느 날 성주는 환쟁이를 불러 영정을 그려 현치문 앞에 걸라는 명령을 내렸다. 거기에 불려 온 환쟁이가 솔거이다. 솔거는 성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성주의 일상을 세밀히 살폈다. 그리고 약속한 열흘 만에 영주의 영정을 마쳤다.
완성된 영정은 실물 크기의 세배에 가까운 성주의 좌상으로 ‘칼만 가까이해도 쫙 벌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살이 쪄오른 볼, 살에 밀려 거의 닫힐 위기에 몰려 있는 가느다란 눈. 뚱뚱한 몸집의 체면을 손상하기에 제격인 채신머리없이 달라붙은 염소수염, 몸집을 닮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상 넓은 줄만 아는 펑퍼짐하게 퍼져 버린 코, 그 장대한 육신을 먹여 살리기에 안성맞춤인 두껍고도 큰 입. 어느 부분이든 실물과 똑같았다.’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다. 영정을 본 신하들은 ‘저건 성주님 영정이 아니옵니다.’ ‘어찌 성주님의 모습이 저러하오리까.’ ‘저자가 감히 성주님을 모독하고 있사옵니다.’ 등 성주에게 아부하기 바빴다. 성주는 솔거를 감옥에 가두고 지루에게 다시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지루와 솔거는 한 스승에게서 배운 제자이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설악산과 경포대 하에게 낙산이란 곳에서 일출을 그려오는 숙제를 내셨다. 솔거와 지루는 한 짝이 되어 낙산에 도착했다. 그들은 구름이 끼어 일출을 볼 수 없었다. 지루는 ‘찬연하게 불붙어 타고 있는 하늘과 바다, 그 사이에 이글이글 제 몸을 사르고 있는 불덩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어 놓고 있는’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솔거는 백지를 제출했다. 그 이유는 해가 뜨지 않아 일출을 볼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거는 집으로 돌아와 앓아누웠다. 사흘째 되는날 찾아오신스승님은 지루의 그림보다 몇 배 훌륭한 일출을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스승님의 문하에 계속 남도록 하였다.
지루가 완성한 성주의 영정은 ‘한없이 인자하고 후덕한 기운이 풍기는 흡사 부처님이 의관 정제한 것이 아닌가 착각할’ 그림을 완성하였다. 하옥 되었던 솔거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3. 불편한 진실
성주는 신하들이 진언대로 ‘백성들이 태평성세를 누리며 내 덕을 칭송함’에 답으로 영정을 현치문 앞에 걸겠다고 했다. 신하들의 대답은 “과연 현안이시옵니다.” “성주님의 은혜 하해와 같사옵니다.”였다. 아마도 성주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하들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후회의 빛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하들은 진실이 아닌 아부성 말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화가가 그린 성주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사진 찍듯이 그렸을까? 화가가 보이는 모습 그대로 사진을 찍듯이 사실을 그리려 했다면 성주를 몇 시간이든지 앉아있게 하고 모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화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가는 성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일상을 관찰했다. 심지어는 잠자고 있는 침실에 들어가 잠들어 있는 모습도 관찰했다.
화가는 이레째 되는 날 비로소 붓을 들었고 붓을 대기 시작한 후에는 잠을 자거나 먹는 것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하고 그림을 완성하였다. 완성된 영정은 ‘살아 움직이는 성주’였다. 그렇지만 성주는 그림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화가가 그린 그림은 성주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탐욕, 포악함 등 내면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 화가는 성주의 모습과 똑같다고 주장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거울을 보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하지만 아마도 성주는 거울을 통해서도 자신의 진짜 모습은 모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이어야 할까? 때론 진실을 마주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살아가곤 한다. 그것을 ‘처세술’이라고 둘러대기도 하면서. 성주가 성주의 힘 앞에 아부하는 소리만을 듣고자 한다면 성주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이 있다. 간혹 간단한 속담이나 격언이 많은 말을 대신해 주기도 한다.
「어떤 솔거의 죽음」 글 조정래 한솔교육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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