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옹전」은 1757년 박지원이 실존 인물인 민유신이 죽은 뒤에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와 작가 박지원이 민유신을 만나 겪었던 일들을 엮은 전기이다. 「민옹전」을 글자 그대로 풀면 ‘‘민 가 노인의 전기’이다. 하지만 ‘민’은 민가 성을 의미하지만, ‘백성 민’ 벼슬을 하지 않는 백성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민 노인 이야기
민 노인은 경기도 남양에 살았다. 무신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참여하여 공을 세워 종삼품에 해당하는 첨사 벼슬을 얻었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년)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과격파와 남인 일부가 연합에 무력을 정권을 빼앗으려 일으킨 난이다. 이후 민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민 노인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글을 잘하였다고 한다. 민 노인은 매일 훌륭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으며 훌륭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닮고 싶어 했다.
일곱 살이 되자, 방의 벽에다 큼지막하게 이렇게 썼다.
“항탁이 스승이 되었다.”
항탁은 겨우 일곱 살의 어린아이였을 때 이미 성인이던 공자를 만나 문답을 했는데, 공자가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생략)
열두 살이 되자, 이렇게 썼다.
“감라가 장수가 되었다.”
감라는 춘추 시대 진나라 사람인데, 불과 열두 살 나이로 조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진나라에 다섯 개의 성을 바치게 한 인물이다.
열세 살이 되자, 이렇게 썼다.
“외항의 어린아이가 항우를 설득하였다.”
(생략)
이렇듯 해마다 새롭게 다짐하며 큰 포부를 잃지 않던 민 노인이었으나 좀처럼 운이 트이지 않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의 나이 마흔이 되었다. 그해에도 민 노인은 글을 적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맹자는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생략)
이렇게 해마다 글씨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벽이 온통 까마귀처럼 시커멓게 되었다.
일흔 살이 되자, 민 노인의 아내가 민 노인을 놀리며 말했다.
“여보, 금 년에는 까마귀 안 그리오?”
민 노인은 기꺼하며 맞장구를 쳤다.
“암, 그려야지. 빨리 먹을 갈아 주구려.”
그러고는 큼직하게 썼다.
“항우의 모사인 범증이 기묘한 계책을 좋아하던 나이이다.”
이때 아내가 발끈 화를 내며 말하였다.
“당신의 꾀가 아무리 기묘하다고 한들 앞으로 써보기나 한단 말이우?”
(생략)
서술자 ‘나’는 갑술년(1754년)에 나이 열여덟 살에 우울증을 앓아 마음이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나는 민 노인을 초대했다. 민 노인이 왔을 때 사람들과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민 노인이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다짜고짜 퉁소부는 사람의 따귀를 갈기었다. 그러고는 “주인은 즐거워하는데 너는 왜 잔뜩 찌푸린 표정이냐?” 하였다. 민 노인은 퉁소를 부느라 힘을 주고 있던 사람을 놀리려 한 것이다. ‘나’는 껄껄 웃었다. 민 노인이 그렇게 한 것은 ‘나’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손님을 불러다 놓았으면 마땅히 손님에게 음식을 권해야 하는 법이거늘 어쩌자고 자네는 혼자서만 음식을 맛본단 말인가? 나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군.”
나는 얼른 사과하고 민 노인의 소매를 잡아 다시 앉혔다. 그러고는 서둘러 민 노인의 밥상을 차려 오게 했다. 민 노인은 사양치 않고 팔을 훌훌 걷어붙이더니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갑자기 입에 침이 고이면서 마음이 뚫리고 코가 벌름거려져 곧 예전처럼 밥을 먹게 되었다.
(생략)
민 노인은 ‘나’에게 책 외우기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나는 다 외웠네.”
나는 아직 한 번도 읽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민 노인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민 노인이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외우는 일이 더디어졌다. 나는 더욱 외워지지 않고 졸리기만 해, 어느새 잠들고 말았다.
우울증으로 잠으로 못 자고, 밥맛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던 ‘나’는 민 노인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인해 밥도 먹고 잠도 잔 것이다. (생략)
“어르신도 무서워하는 게 있어요?”
민 노인은 한참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였다.
“나 자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어. 내 오른 눈은 온갖 조화를 부리는 용이요, 왼 순은 거칠 것 없는 호랑이지. 혀 속에는 날카로운 도끼가 감추어져 있고 구부린 팔은 바로 활이야. 내가 마음을 잘 자지면 어린아이 같이 착하지만, 까딱만 잘못해도 오랑캐가 될 수 있어. (생략)”
“이런 조그만 벌레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내가 보기에는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다니는 것들이 모두 황충이야. 키가 전부 칠 척쯤 되는 데다 머리는 새까맣고 눈은 반들거리지. 주먹도 드나들 만큼 큰 입으로 뭐라 지껄여 대고, 떼 지어 다니느라 발굽이 서로 닿고 궁둥이가 부딪치기도 하지. 그 바람에 농사를 해치며 곡식을 짓밟곤 하니 이것들보다 못된 벌레가 없더. 내가 이것들을 잡고 싶은데 큰 바가지가 없는 게 한이야.”
(생략)
이듬해에 민 노인은 세상을 떠났다. 민 노인은 별나고 호탕했지만, 성품은 깨끗하고 정직했으며 착한 일을 즐겼다. 《주역》에 밝았고 노자의 말을 좋아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한다. 그 두 아들이 모두 무과 시험에 합격했으나 아직 벼슬은 없다.
(생략)
‘나’는 다시 민 노인을 만나고 싶어 했으나 민 노인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민옹전〉을 쓰는 이유로, 민 노인과 함께 나눈 은어며 우스갯소리며 재담이며 꼬집는 말들을 모아 엮었다고 한다. ‘나’가 〈민옹전〉을 쓴 나이가 정축년(1757년) 스물한 때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작가 박지원이다. 작가 박지원이 민 노인의 입을 빌려하는 말들은 오늘날에 비치어 보아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의 백성 눈에 위정자들은 벼멸구나 다름없는 벌레로 보였다. 그러면 오늘날 위정자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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